일상생활/삶의 흔적

동대사 (東大寺, 도다이지)

황준기 2012. 11. 9. 14:37
2006년 5월 13일(토요일)
이른 아침을 먹고 교토 - 나라 이동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사슴공원과 동대사에 이르다.



중생들의 초발심이 빚어낸 연화장 세계


도다이지 대불전에 들어서자 순간 숨이 턱 멎었다. 건물에 꽉 들어찬 청동대불. 너무도 엄숙하고, 너무도 웅장한, 내 가슴 밑바닥까지 드러내고 울어도 될 만큼 그의 품은 넉넉해 보였다.


‘아! 이래서 과거에 큰스님들이 대불을 조성하셨구나!’

역시 딴나라에 가면 내가 아주 당연시 여기던 사물들이 또다른 관점으로 다가오곤 한다.


도다이지 대불전이 비록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하지만, 대불전에 들어서니 왠지 좁다는 느낌이 들었다. 절 내부에 빽빽이 들어선 상점들이나 각종 전시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건물 내부가 대불에 비해 비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안내판을 봤더니 역시나, 화재가 나는 바람에 1709년에 새로 개축된 건물이었다. 8세기 중반 조성된 대불전은 폭이 동서로 각 2칸씩 넓어 지금의 1.5배 규모였다고 한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도 대불이 지닌 균형과 섬세함 그리고 조화로운 얼굴에 비친 경건함에 압도되어 이것이 위대한 예술품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금강석으로도 끊을 수 없는 절대 진리의 수호자는 굳게 다문 입술, 우뚝 솟은 콧날, 서늘한 눈매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지배하려는 절대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 눈에 비친 비로자나불의 모습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는데 부처님의 법이 필요했던 천황의 정치적 목적 이전에 교키(行基) 스님의 자비와 교화가 이루어낸 일본 불교인들의 ‘초발심’의 산물이었다.


737년 일본 전역에서 천연두가 창궐했다. 20세기초까지 치료약도 예방약도 없던 이 병이 발발해 전국으로 번져갔으니, 당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산으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없었다. 어떤 이는 하늘의 신이 일본 땅을 벌하는 것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천황이 어질지 못해 가축신의 재앙을 입은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쇼무 천황은 전국의 제후들에게 석가모니상과 협시 보살상을 조성케 하고 『대반야경』 일부를 서사시켜 역병을 진압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천연두는 동(東)으로 동(東)으로 퍼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큐슈 지역에서는 후지와라노 히로쯔구(藤原廣嗣)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쇼무 천황은 황후와 관인들을 이끌고 왕경인 나라를 버리고 이세로 피난을 갔다. ‘뒤숭숭한 민심을 바로 잡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데….’ 가와치[河內]의 지식사(知識寺)에서 비로자나불께 참배를 하던 쇼무 천황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시방제불의 법신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법으로 민심을 위로하리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러를 만한 부처님상을 조성해야겠다!’


대형 불상을 조성하기로 결심한 쇼무 천황은 당시 민중들로부터 커다란 신망을 얻고 있는 교키 스님에게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하게 된다. 이때가 서기 743년.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교키 스님은 조정의 큰 골치꺼리였다. 당시에는 관승이라 해서 정부에서 직접 시험을 치러 승려를 임명했으며, 스님들이 저잣거리에 나서 대중들을 교화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물론 반란의 위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교키라는 스님은 조정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공공연히 대중 교화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워낙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우니 함부로 잡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사람들에게 천황에게 반하는 설법이나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상황은 역전되어, 쇼무 천황은 민중들의 커져만 가는 불안을 잠재우고 전국민적인 불사를 진행하기 위해 교키 스님에게 간절한 부탁을 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스님께서 일본의 민심을 모아주셔서, 전국민의 정성으로 가난과 역병을 물리칠 수 있는 불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교키 스님 또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부처님의 광명이 너무도 절실하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결국 70이 넘은 노령에도 스님은 직접 바리때를 들고 비로자나 부처님을 조성하기 위한 탁발에 나섰다. 국가의 안녕도 안녕이려니와 부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불법을 전파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 여겼던 것이다.


어떤 이는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어떤 이들은 신들 중에서도 가장 높다는 호토케[佛, 일본어로 호토케는 부처님이라는 뜻도 되고, 죽은 조상이라는 의미도 된다]를 위로하기 위해서 크고 작은 불사금을 보태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직접 나라로 가서 불상 조성에 참가했다. 재력이 뒷받침되는 지방의 호족들은 불상에 입히기 위한 금을 기부했다.


나라 도다이지에서 출토된 목간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인원만 연간 200만명에 달했고, 무려 250톤의 청동이 사용됐다. 이렇게 해서 높이 16.2m의 세계 최대 금동 좌불이 조성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도다이지 청동대불을 이야기할 때마다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이야기한다.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형 불사가 필요했으며, 그 어마어마한 대불사를 위해 희생된 민중의 피와 땀을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그러한 정치적 배경이 없었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불교의 최고 극점으로 일컬어지는 불국사나, 상좌부 불교의 종착점 인도네시아 보르부드르가 단지 자본이나 권력으로만 만들어졌겠는가.


현재 남아있는 불교유적들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작품은 대부분 불교가 전파된지 100∼200여년 남짓 지난 시점에 제작된 것들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무와 돌, 산천과 바다를 관장하는 신들을 두려워하던 고대인들이 처음으로 불교 교리를 접했을 때 그들의 놀라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무아미타불만 잘 외어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이들은 천지가 뒤바뀌고, 새 세상이 열리는 감격을 느꼈으리라.


도다이지 불사에 몸과 마음을 바쳐 보시한 사람들은 원인도 모를 병으로 죽어간 부모와 자식의 명복을 발원하고, 내 씨족이 멸하지 않고 길이길이 보존되길 빌었을 것이며, 그와 함께 국가와 민족의 안녕을 발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 속 깊숙이 숨겨져 있다는 그 ‘여래장’이 언젠가 커다란 원력으로 발현되길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의 감동과 간절한 바람은 최고의 문화유적으로 승화됐고, 그들의 ‘초발심’은 1000년 2000년을 넘나드는 예술작품으로 전해졌다.


도다이지는 일본의 텐표(天平) 문화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텐표 문화는 710년 수도를 헤이죠코(平城京)로 옮기면서 시작된다. 일본인들은 이 시대를 쇼무 천황의 태평성대(724∼749년)라고 부른다. 율령제를 만들고 난 이후 그 통제력이 약화될 무렵이라 정치적으로는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불교문화사적으로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시대로 평가된다. 특히 이 시대는 한반도와 중국의 문화가 그대로 수입되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조금씩 일본식 문화가 창조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도다이지에 미친 한반도 문화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도다이지의 대불 철조의 책임을 맡은 쿠니나카노키미마로(國中公麻呂)와 대불전 건축 책임자 이나베노모모요(猪名部百世), 대불에 입힐 황금을 모은 백제왕 경복(敬福), 그리고 대불 조성을 위해 전국에서 탁발행을 펼친 교키 스님은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도다이지의 모델이 신라 불국사였다는 설도 조심스럽게 펼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 불국사는 『화엄경』에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를 그대로 재현한 사찰이다. 도다이지 또한 『화엄경』에서 시방제불(十方諸佛)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으며, 이 곳의 기본 가람구조는 연화장 세계의 표현이다. 또한 회랑으로 연결되는 가람형태며, 대불전의 건축양식, 특히 석굴암의 부조를 연상시키는 금강역사의 모습은 이곳이 불국사의 사촌쯤 되는 사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불국사가 완공된지 2년뒤에 도다이지가 조성되었으니, 당시 신라의 기술자들이 나라로 대거 유입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신라에서 나라로 들어오는 유입구인 오바마 지역에는 지금도 붓코쿠[佛國寺]라는 절과 시나키[白木, 신라의 일본음 표기]라는 지명 등이 남아있는 것도 그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여담을 한마디 덧붙이자면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나단 스위프트는 일본을 여행하고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이야기’를 착상했다고 한다. 엄청난 대불, 웅장한 건물과는 대비되는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들을 보면서 소인국의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세계 최대규모의 목조건물 안에 안치된 이 어마어마한 대불에 절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사물의 잣대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그리고 근대 서구인들의 높은 콧대가 사실상 자기망상에 불과하다는 풍자를 하고 싶어진 것은 아닐까.


탁효정 기자



http://kr.blog.yahoo.com/ahrdls03070/6178.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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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사슴공원 - 1,200여 마리의 사슴들이 자유롭게 노닌다.
동대사 입구에 사슴과 사람이 어우러져 먹이를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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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전

도다이사의 중심이 되는 금당으로 이 안에 대불이 모셔져 있다.
건물 높이가 47.5m, 길이가 37m, 남북길이가 50.5m로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로 백제 인의 불심과 기술로 세워진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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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기가 조금 후져서 불상이 촬영되지 않아 그림을 빌려왔습니다.)

대불전 안에 있는 불상으로 노사나불이다.

이 불상은 세계 최대의 금동불로서 높이 약 16미터, 무게 380톤, 얼굴의 길이 5미터 이다. 백제인의 기술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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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대불전 - 몇차례 변화를 거쳐 지금의 대불전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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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코 - 대불의 코구멍과 일치한다나...
여기를 통과하면 순산을하고 행운이 있다나 보다. 수학여행온 일본 여고생들 모두 통과하고 우리 일행 삼택도 순산(?)을 빌며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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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입시지옥 - 여기에 소원을 써서 걸면 대불이 소원성취(그런데 550엔 ?)
나도 부모라 550엔 투자하네..

스님은 안보이고 장사꾼만 그득하니....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장사꾼들을 몰아내듯, 부처님도 부처님 집에서 장사꾼좀 내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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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여래 - 교키스님인가(?)
무병을 원하며 많은 이들이 부처님을 쓸어 안는다.
나도 무릎과 발을 만지고 돌아 선다. 효염을 원하시면 제 손을 만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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