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삶의 흔적
헤겔의 눈으로 본 인간충돌과 지적, 인식론적 테러리즘
황준기
2012. 11. 9. 11:52
헤겔의 눈으로 본 인간충돌과 지적, 인식론적 테러리즘
작년에 한 African American Studies 교수를 통해 값진 배움을 얻었다. 헤겔에 관한 것이었는데,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독일 철학자의 사상을 아주 새로운 관점으로 활용했다. 물론 그가 개인적으로 특허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아프리카 교수가 바라보는 인간의 착취적 역사는 단지 착취 국 당사자들인 서방 국가들이나 아프리카국가들에게만 경각심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생활에도 엄청난 도전을 던졌다.
우선 그는 헤겔의 사상을 몇 가지 중요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의 사고가 어떻게 서방 식민 제국주의자들에게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는지를 탐구해 나갔다. 그가 지적하는 헤겔리안 패러다임(Hegelian Paradigm)은 dialectical struggle, materialism과 essentialism으로 집약된다. 헤겔의 사상을 이처럼 단순화하고 일반화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지만 그가 펼치는 논리는 일리가 있었다.
그가 주장하길, 식민지시기에 서방국가들의 정신은, 그들이 의식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유물론에 근거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유물론적 정신성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 더 나아가 본질이 그가 안고 있는 물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챨스 다윈도 한 몫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어쨌든, 쉽게 표현하자면, 잘 사는 집안에 태어난 자식은 결국은 좋은 인간으로 될 수밖에 없고, 못 사는 집에 태어난 자식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열등한 존재의 틀을 벗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아프리카의 찬란했던 역사를 세계사 속에서 완전히 멸종케 했다. 역사론에 있어, 헤겔은 아프리카를 야만족으로 분류하며, 자의식(self-consciousness)조차 없는 존재로 격하시킨다.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신(Supreme God) 의식 없다며 그들의 종교적 행위조차 원시적인 것으로 무시한다. 그는 날씨와 지형적 악조건을 거론하며, 아프리카인들이 본질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헤겔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집트 문명을 북아프리카에서 제외해 버리고 만다. 속된 말로 아프리카의 토양에서 무슨 선한 게 나오겠냐 라는 논리이다.
이러한 유물론은 Essentialism을 동반한다. Essentialism은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고, 그것이 그 본질의 정해진 한정적 범위 내에서 특정한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흑인은 흑인들의 본질이 있고 백인은 백인들의 본질이 있어, 그 본질들이 규정하는 능력의 반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백인이 죄를 범하면 그와 관련된 주변 정황들을 탐구해서 그 범죄 원인자를 찾지만, 흑인들이 범죄하면, 대답은 아주 단순해진다. 그냥 흑인이라는 것 자체가 본질이다. 그것이 설명을 위한 필요 충분조건인 것이다. 일본 한 기자가 오발된 폭탄을 들고 들어오려다 사고를 일으킨 사건을 보고 일부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쪽발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리안 패러다임의 전형성이다.
유물론과 Essentialism은 곧, 지배와 피지배간의 변증법적 투쟁을 정당화한다. 그가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처럼, 아프리카가 신(Supreme God) 의식을 갖기 위 노예가 진실로 불의한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도("slavery is in and for itself injustice") 아프리카 대륙에겐 진보라는 명목으로 예외다. 갑자가 마틴 부버의 "I and Thou"가 생각난다. 자아가 참 자아가 되기 위해선 타자와의 교통을 필요로 한다. 그 교통은 궁극적으론 자아에게선 이종(heterogeneity)과의 만남으로 인한 고통이며 투쟁이다.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는 약자를 위한 강자의 자선이다. 식민지에 관한 일본인들의 교육과 다를 바 없다. 한때, 함께 강의를 듣고 공부하며 친하게 지낸 일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 관한 일본 식민정책이 근대적 인프라스트럭처 등을 제공하며 도움을 줬다는 야만적 논리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강자의 행위는 선하다, 왜냐하면, 그가 본질에 있어 강자이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70% 이상의 국민들이 이라크와 전쟁을 끝까지 지지했다. UN의 결의가 아무런 도덕적 힘을 얻지 못했다. 평화적 해결이라는 명분이 약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후진국에다 정치적 독재국가이며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힌 이라크는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 경찰 국가인 미국으로부터 강자의 훈육을 받을 100%을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이 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퇴행적 혹은 비이성적으로 보여진다.
냉철한 과학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무슬림이라는 essence가 그렇게 단정짓도록 만든다. 미국인 자신들의 침략은 자신들 스스로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이라크 국민을 미국인들의 거친 형태의 자선이다. 서방인들 특히 미국인들에 있어 이슬람국가들은 조롱의 혹은 훈계의 대상이다. 정교 분리원칙인 미국에 눈으로는 종교가 정치 사회를 포괄하는 이슬람국가를 이해할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의 눈에조차 원시적으로 비쳐지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고 하는 판단은 강자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강자가 취하는 A라는 행동은 약자가 취하는 동일한 A라는 행동과 물리적으로는 일치하지만, 가치에 있어선 판이하게 다르다. 강자의 A는 선하다. 왜냐하면 강자가 하기 때문이다. 미운 놈은 뭘 해도 미워 보인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미국이 UN결의를 어긴 것은 보이지 않는 국제사회의 법질서를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일본, 호주 같이 상대적 약소국은 어쩔 수 없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이 대량살상 무기를 갖춘 것은 문제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essence가 강한즉 선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마디로 정의를 전파하고 사수하는 전도자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사 어딜 가든 정치행위는 발생하고, 정치행위가 어디에서 발생하든 이러한 헤겔리안 증후군은 발견된다. 국내 국제 어디로 가나,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모호하다. 누가 하면 선한 것이고 누가 하면 악한 것이다. 꿈 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도 정치적으로 생각해 볼 말이다. 결국은 다윈의 약육강식의 논리나, 헤겔의 변증법적 투쟁이나 다를 바 없다. 권력 가진 자의 논리에 따라 가치체계가 형성되어지고 그것에 반항하면 사회적 일탈이라 부른다.
라인 홀드 니버식으로 이해하면, 사회적 가치는 궁극적으로 Dominant Class의 의도대로 구축되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냥 그것을 자기 것으로 최면을 걸고 합리화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헤겔리안 패러다임을 단지 서방국가들에게만 뒤집어씌울 일이 아니다. 한국 사람도 동남아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서양인들을 선호하는 태도는 18세기 식민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와 다를 것 하나도 없다. 이러한 행위는 지적 혹은 인식론적 테러리즘(Intellectual and Epistemic Terrorism)이라고 불린다.
미국 시민들은 화학무기 따위의 물리적 테러를 두려워하지만, 진작 무서운 것은 무기는 그들 의식 속에 있는 헤겔리안 패러다임이다. 부시행정부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공적으로는 이슬람이 자신들의 적이 아니라고 외치지만, 자신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새 빨간 거짓말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이슬람 종교가 적이 아니라고 외쳐도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무슬림들이 미국을 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약간 학문적으로 얘기한다면, 미국은 무슬림들이 말하는 경계하는 자힐리야(Jahiliah)의 matrix이다.
아랍어 자힐리야를 한국말로 풀기는 쉽진 않지만, 인본주의쯤 된다고 하겠다. 투자를 통한 이윤축척이나 개인주의 그리고 할리우드 상업영화를 통한 문화침략적 미국식 자본주의는 이슬람에게서 궁극적 적이다. 자신을 적으로 규정하는 이슬람국들에게 과연 미국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은 미국 민들은 영웅으로 떠받든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희생한 팔레스타인 민간인 용사들은 테러리스트이다. 윤봉길은 독립투사요,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이다.
미국에 있으면 있을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미국인들은 정보에 어둡고, 한국 사람들보다 더 정치가들에게 잘 속아넘어간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어떻게 그토록 빨리, 부시행정부가 반격에 들어 갈 수 있었을까? 쿠웨이트 석유산업의 약 90%가 부시가의 석유 산업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들을 과연 미국민의 몇 %가 알고 있을까?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정권이 미국 정부에 의해 세워진 정부라는 사실을 미국인만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키스탄의 탈레반정부는 어떻고, 남미의 CIA가 비밀리에 전복시킨 민주정부는 어떠한가?
갑자기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본다. 나는 어떠한가? 나 자신도 그렇다. 헤겔리안 패러다임 공식을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적어도 내 자신에게도 지적 인식론적 테러리즘이 있음이 분명하다. 아직도 흑인들을 불신하는 마음이 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내가 백인들에게 똑같이 취급당하면서도 말이다.
나는 백인도 불신한다. 이곳에서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길러진 방어심리의 발로다. 그러나 내가 내린 결론은 좀 공격적이다. 내가 앞에서 말한 교수의 가르침에 아쉬움을 느낀 것은 대안 부재였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엄청난 양의 사고와 논리를 세상을 설명해도 현금가치가 지니는 결과물 혹은 생산품을 끌어내지 못하면, 무의미한 짓을 한 것이다. 그냥 신세 한탄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단순하다. 그냥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힘을 길러야 하고 권력사회에서는 권력을 길러야 한다. 강자에게 불만이 있거든 강자와 대응할 만한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럴 배짱이나 자신감이나 힘이 없다면, 현실 체제에 순응하고, patron-client 관계 속에 강자에게 도움 받으며 약자로 편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난 나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다만, 불평등한 현실을 간파하고 그냥 신세한탄만 하거나, 생산성과 책임성 없는 막무가내 식 투쟁을 하는 시민운동이나 재야운동은 내가 가장 경멸하는 것 중에 하나다. 그들은 헤겔리안 권력투쟁 가운데 강자도 약자도 아닌 약자의 목소리를 팔아먹고 사는 기생적 존재에 불과하다.
우선 그는 헤겔의 사상을 몇 가지 중요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의 사고가 어떻게 서방 식민 제국주의자들에게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는지를 탐구해 나갔다. 그가 지적하는 헤겔리안 패러다임(Hegelian Paradigm)은 dialectical struggle, materialism과 essentialism으로 집약된다. 헤겔의 사상을 이처럼 단순화하고 일반화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지만 그가 펼치는 논리는 일리가 있었다.
그가 주장하길, 식민지시기에 서방국가들의 정신은, 그들이 의식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유물론에 근거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유물론적 정신성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 더 나아가 본질이 그가 안고 있는 물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챨스 다윈도 한 몫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어쨌든, 쉽게 표현하자면, 잘 사는 집안에 태어난 자식은 결국은 좋은 인간으로 될 수밖에 없고, 못 사는 집에 태어난 자식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열등한 존재의 틀을 벗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아프리카의 찬란했던 역사를 세계사 속에서 완전히 멸종케 했다. 역사론에 있어, 헤겔은 아프리카를 야만족으로 분류하며, 자의식(self-consciousness)조차 없는 존재로 격하시킨다.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신(Supreme God) 의식 없다며 그들의 종교적 행위조차 원시적인 것으로 무시한다. 그는 날씨와 지형적 악조건을 거론하며, 아프리카인들이 본질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헤겔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집트 문명을 북아프리카에서 제외해 버리고 만다. 속된 말로 아프리카의 토양에서 무슨 선한 게 나오겠냐 라는 논리이다.
이러한 유물론은 Essentialism을 동반한다. Essentialism은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고, 그것이 그 본질의 정해진 한정적 범위 내에서 특정한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흑인은 흑인들의 본질이 있고 백인은 백인들의 본질이 있어, 그 본질들이 규정하는 능력의 반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백인이 죄를 범하면 그와 관련된 주변 정황들을 탐구해서 그 범죄 원인자를 찾지만, 흑인들이 범죄하면, 대답은 아주 단순해진다. 그냥 흑인이라는 것 자체가 본질이다. 그것이 설명을 위한 필요 충분조건인 것이다. 일본 한 기자가 오발된 폭탄을 들고 들어오려다 사고를 일으킨 사건을 보고 일부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쪽발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리안 패러다임의 전형성이다.
유물론과 Essentialism은 곧, 지배와 피지배간의 변증법적 투쟁을 정당화한다. 그가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처럼, 아프리카가 신(Supreme God) 의식을 갖기 위 노예가 진실로 불의한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도("slavery is in and for itself injustice") 아프리카 대륙에겐 진보라는 명목으로 예외다. 갑자가 마틴 부버의 "I and Thou"가 생각난다. 자아가 참 자아가 되기 위해선 타자와의 교통을 필요로 한다. 그 교통은 궁극적으론 자아에게선 이종(heterogeneity)과의 만남으로 인한 고통이며 투쟁이다.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는 약자를 위한 강자의 자선이다. 식민지에 관한 일본인들의 교육과 다를 바 없다. 한때, 함께 강의를 듣고 공부하며 친하게 지낸 일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 관한 일본 식민정책이 근대적 인프라스트럭처 등을 제공하며 도움을 줬다는 야만적 논리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강자의 행위는 선하다, 왜냐하면, 그가 본질에 있어 강자이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70% 이상의 국민들이 이라크와 전쟁을 끝까지 지지했다. UN의 결의가 아무런 도덕적 힘을 얻지 못했다. 평화적 해결이라는 명분이 약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후진국에다 정치적 독재국가이며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힌 이라크는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 경찰 국가인 미국으로부터 강자의 훈육을 받을 100%을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이 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퇴행적 혹은 비이성적으로 보여진다.
냉철한 과학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무슬림이라는 essence가 그렇게 단정짓도록 만든다. 미국인 자신들의 침략은 자신들 스스로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이라크 국민을 미국인들의 거친 형태의 자선이다. 서방인들 특히 미국인들에 있어 이슬람국가들은 조롱의 혹은 훈계의 대상이다. 정교 분리원칙인 미국에 눈으로는 종교가 정치 사회를 포괄하는 이슬람국가를 이해할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의 눈에조차 원시적으로 비쳐지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고 하는 판단은 강자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강자가 취하는 A라는 행동은 약자가 취하는 동일한 A라는 행동과 물리적으로는 일치하지만, 가치에 있어선 판이하게 다르다. 강자의 A는 선하다. 왜냐하면 강자가 하기 때문이다. 미운 놈은 뭘 해도 미워 보인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미국이 UN결의를 어긴 것은 보이지 않는 국제사회의 법질서를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일본, 호주 같이 상대적 약소국은 어쩔 수 없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이 대량살상 무기를 갖춘 것은 문제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essence가 강한즉 선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마디로 정의를 전파하고 사수하는 전도자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사 어딜 가든 정치행위는 발생하고, 정치행위가 어디에서 발생하든 이러한 헤겔리안 증후군은 발견된다. 국내 국제 어디로 가나,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모호하다. 누가 하면 선한 것이고 누가 하면 악한 것이다. 꿈 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도 정치적으로 생각해 볼 말이다. 결국은 다윈의 약육강식의 논리나, 헤겔의 변증법적 투쟁이나 다를 바 없다. 권력 가진 자의 논리에 따라 가치체계가 형성되어지고 그것에 반항하면 사회적 일탈이라 부른다.
라인 홀드 니버식으로 이해하면, 사회적 가치는 궁극적으로 Dominant Class의 의도대로 구축되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냥 그것을 자기 것으로 최면을 걸고 합리화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헤겔리안 패러다임을 단지 서방국가들에게만 뒤집어씌울 일이 아니다. 한국 사람도 동남아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서양인들을 선호하는 태도는 18세기 식민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와 다를 것 하나도 없다. 이러한 행위는 지적 혹은 인식론적 테러리즘(Intellectual and Epistemic Terrorism)이라고 불린다.
미국 시민들은 화학무기 따위의 물리적 테러를 두려워하지만, 진작 무서운 것은 무기는 그들 의식 속에 있는 헤겔리안 패러다임이다. 부시행정부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공적으로는 이슬람이 자신들의 적이 아니라고 외치지만, 자신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새 빨간 거짓말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이슬람 종교가 적이 아니라고 외쳐도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무슬림들이 미국을 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약간 학문적으로 얘기한다면, 미국은 무슬림들이 말하는 경계하는 자힐리야(Jahiliah)의 matrix이다.
아랍어 자힐리야를 한국말로 풀기는 쉽진 않지만, 인본주의쯤 된다고 하겠다. 투자를 통한 이윤축척이나 개인주의 그리고 할리우드 상업영화를 통한 문화침략적 미국식 자본주의는 이슬람에게서 궁극적 적이다. 자신을 적으로 규정하는 이슬람국들에게 과연 미국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은 미국 민들은 영웅으로 떠받든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희생한 팔레스타인 민간인 용사들은 테러리스트이다. 윤봉길은 독립투사요,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이다.
미국에 있으면 있을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미국인들은 정보에 어둡고, 한국 사람들보다 더 정치가들에게 잘 속아넘어간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어떻게 그토록 빨리, 부시행정부가 반격에 들어 갈 수 있었을까? 쿠웨이트 석유산업의 약 90%가 부시가의 석유 산업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들을 과연 미국민의 몇 %가 알고 있을까?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정권이 미국 정부에 의해 세워진 정부라는 사실을 미국인만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키스탄의 탈레반정부는 어떻고, 남미의 CIA가 비밀리에 전복시킨 민주정부는 어떠한가?
갑자기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본다. 나는 어떠한가? 나 자신도 그렇다. 헤겔리안 패러다임 공식을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적어도 내 자신에게도 지적 인식론적 테러리즘이 있음이 분명하다. 아직도 흑인들을 불신하는 마음이 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내가 백인들에게 똑같이 취급당하면서도 말이다.
나는 백인도 불신한다. 이곳에서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길러진 방어심리의 발로다. 그러나 내가 내린 결론은 좀 공격적이다. 내가 앞에서 말한 교수의 가르침에 아쉬움을 느낀 것은 대안 부재였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엄청난 양의 사고와 논리를 세상을 설명해도 현금가치가 지니는 결과물 혹은 생산품을 끌어내지 못하면, 무의미한 짓을 한 것이다. 그냥 신세 한탄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단순하다. 그냥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힘을 길러야 하고 권력사회에서는 권력을 길러야 한다. 강자에게 불만이 있거든 강자와 대응할 만한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럴 배짱이나 자신감이나 힘이 없다면, 현실 체제에 순응하고, patron-client 관계 속에 강자에게 도움 받으며 약자로 편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난 나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다만, 불평등한 현실을 간파하고 그냥 신세한탄만 하거나, 생산성과 책임성 없는 막무가내 식 투쟁을 하는 시민운동이나 재야운동은 내가 가장 경멸하는 것 중에 하나다. 그들은 헤겔리안 권력투쟁 가운데 강자도 약자도 아닌 약자의 목소리를 팔아먹고 사는 기생적 존재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