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삶의 흔적

북경이야기 - 1. 천안문

황준기 2012. 11. 9. 14:49

 

북경이야기

언제 : 2007. 06.01 - 06.04
누가 : 황준기와 직원들....


항상 여행을 떠날때 마음이 설레는 것은
어릴적 어머니 손잡고 소풍 가던 시절이나
머리가 반백이 된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듯 하다.
하물며 나처럼 역마살이 낀 놈이야...
로또만 맞으면
평생 길거리나 헤매고 다니다
기운 떨어지고 움직일 수 없을때...
천상병님의 싯말처럼
소풍 한 번 잘했노라!!!
큰소리 치고 이 세상 하직하련다.


1. 천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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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北京(북경)] 쯔진청[紫禁城(자금성)]의 오문(午門) 남쪽에 있는 문. 15세기 초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가 서울을 난징[南京(남경)]에서 베이징으로 옮길 때 세웠다. 처음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 하였으나 1651년 개축할 때 천안문으로 개명하였다. 문 앞 대광장 중앙에는 38m 높이의 인민영웅기념비가 있고 광장 주위에는 중앙관청이 모여 있다. 1919년 5·4운동 이래 중국인들의 시위집회에 이용되는 한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식전도 여기서 거행하였다.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는 중국인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군(軍)의 무력진압으로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때는 인민영웅탑 앞에서 성화 점화식이 있었다. - 야후 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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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파에 휩슬려 있으면서... 지나가는 관광객을 둘러보니
농한기에 버스 타고 관광 다니던 장인, 장모 생각이 든다.
수없는 중국 인민들의 행렬이 끝이 없고... 시끄러운 소리들 중에
낮익은 소리 바로 우리 동포들이다. 한족과 한민족...
간혹 서양인들 보이나 예상외로 일본인들은 거의 없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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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여기저기 공안들이 깔려있고 가끔 젊은이 들이 강제로 차에
실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역시 여기는 개방이 되었다지만 사회주의
국가다. 유신시절 사복입은 경찰 내지는 요원에 의해 수없이 검문
당하고 혹은 끌려가 엄청난 고초를 당하던 생각이 든다.
아! 이 하늘이 뿌연 공해인지 황사인지로 내 눈을 가리는 이유가
이것일까? 순간적으로 경직되어 가는 내 자신을 발견하며 우울한
감정에 발걸음이 무겁다.

베이징에 머무를때는 몰랐으나 귀국후 신문을 보니...
6월 4일이 천안문 사태 18주기라... 중국 요소요소에서 시위가 있었다고
하니... 중국 공안들이 잔득 긴장한 이유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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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영웅기념비
기념비 뒤쪽 건물에 모택동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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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대회당(우리 국회의사당)




조선일보 200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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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사태 (天安門事態)

1989년 6월 3∼4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정치참극.

1978년 12월 중국은 공산당 제11기 제3차중앙위원회전체회의(3中全會)에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을 결의한 이래 농업생산책임제 도입, 기업자주권확대, 경제특구 설치, 합영사업 인가 등 서구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경제적 자유·개방의 폭을 확대해 나갔으나 정치개혁은 상대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공산당의 부정부패, 급증하는 인플레이션과 소득격차에서 오는 불만감이 상승효과를 일으켜, 1989년 4월 15일 급진개혁주의자로 학생들의 추앙을 받던 전(前)당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이 사망하자, 베이징대학[北京大學(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을 찬양하고 보수파를 비난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하였다.

그 뒤 베이징과 상하이[上海(상해)]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전개되고, 22일 거행된 후야오방의 장례식에는 수십만의 학생과 시민이 참석하여 본격적인 민주화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당내 보수파는 개혁파 당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조자양)]을 축출하고, 강경파인 리펑[李鵬(이붕)]이 정정(政情)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의 시위는 중국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상하이·선양[瀋陽(심양)]·장춘[長春(장춘)]·장사[長沙(장사)] 등으로 확대되자 강경보수파는 5월 19일 전격적으로 베이징에 군을 투입하고 20일 베이징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시민·학생들이 이를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하자 덩샤오핑은 이를 체제도전으로 간주하여, 6월 3일 제27군을 투입하여 진압작전을 개시했으나 1백만 시민의 육탄저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10시부터 탱크·장갑차를 앞세워 시위군중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무력진압을 강행하여, 4일 오전 5시 계엄군은 천안문광장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1400여 명의 사망자, 1만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태의 결과 중국은 서방측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강경보수파의 권력장악으로 자유·개방 정책이 후퇴하게 되었다.

 

 

 

 

 

 神이 맹글었는걸요. ㅎ
참 황송스러워라! 모든 인간은 神이 맹글었지요?
막내도, 푸른산도...
고마움에 이슬 맞고 찍은 얘쁜 들꽃 몇장 멜로 보낼게요